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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언어와 문해력

솔직히 저는 제 감정을 꽤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하루에 "짜증 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밥을 안 먹을 때도, 일이 꼬일 때도, 버스를 놓쳤을 때도 전부 "짜증 나"였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제 하루의 모든 감정을 삼켜버리고 있었다는 걸, 영상을 보다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알게 됐습니다.

"짜증 나"가 눌러놓은 것들

제가 직접 떠올려봤습니다. 아이가 떼를 쓰다 잠든 날 밤, 저는 분명 "아 진짜 짜증 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짜증이었을까요.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서운함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최선을 다했는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운 서운함. 그걸 짜증이라는 단어 하나로 눌러버렸던 겁니다.

이렇게 감정을 뭉뚱그려 표현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감정 억제(emotional suppression)라고 합니다. 감정 억제란 자신의 내면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단순화해버리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쌓이면 감정 조절 능력 자체가 무뎌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감정 표현과 정신 건강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자신의 감정을 세밀하게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인 감정 입자도(emotional granularity)가 높을수록 우울·불안 증상이 낮게 나타났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여기서 감정 입자도란, 쉽게 말해 "기분 나쁘다"가 아니라 "배신당한 느낌이다", "무력하다", "억울하다"처럼 감정의 결을 촘촘하게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제 경험상, 이게 정말 어렵습니다. 감정을 들여다보다 보면 생각보다 슬픈 것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짜증 나"로 막아버리는 거라는 말이 뼈에 박혔습니다. 감정을 진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그 감정과 잠깐 마주앉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루 끝에 오늘 느낀 감정을 "짜증"이 아닌 다른 단어로 한 가지씩 찾아보기
  • 책을 읽다가 내 감정과 비슷한 표현을 만나면 밑줄 치고 저장해두기
  • 아이와 대화할 때 "기분이 어때?"보다 "지금 속상해? 아니면 무서워?" 하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기

이렇게 하다 보면 내가 가진 어휘 창고가 조금씩 넓어집니다. 그리고 그 창고가 넓어질수록, 저는 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확증 편향과 독서 습관이 연결되는 지점

영상에서 또 하나 찌르듯이 와닿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보를 접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알고리즘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읽고 싶은 것만 찾게 만든다는 지적이었는데, 솔직히 이건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육아 관련 콘텐츠를 보면서, 저와 비슷한 방식을 지지하는 영상만 자꾸 찾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제 방식이 옳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고, 다른 방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입니다. 확증 편향이란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인지적 경향을 말합니다.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 이 편향을 구조적으로 강화한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쉽게 말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다 보면 세상이 실제보다 훨씬 좁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문해력(literacy)은 이 지점에서 방어막이 됩니다. 여기서 문해력이란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정보의 출처와 의도를 파악하고, 서로 다른 자료를 연결하여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은 영상 한 편을 빠르게 소비하는 것으로는 키워지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느낀 건, 책 한 권을 천천히 읽어낼 때 생기는 그 느린 사고의 리듬이, 정보를 판단하는 근육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입니다.

페이커가 비시즌에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이야기, 그냥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차이를 만드는 건 기술이 아니라 메타인지(metacognition)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의 사고 과정 자체를 인식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책을 읽고 자기 생각과 대조하는 훈련이 이 능력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형광펜을 들고 읽으면서 밑줄 친 문장을 나만의 파일로 모으는 습관, 저도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구석에 밀어둔 책에서 딱 한 문장만 건져내도, 그날은 조금 다른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짜증이라는 단어 하나가 감추고 있던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습니다. 감정을 정확하게 부르는 일, 정보를 주체적으로 읽는 일,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를 가능하게 해주는 독서 습관. 어느 것 하나 하루아침에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오늘 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스마트폰 대신 책 한 페이지를 펼쳐드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그게 제 감정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youtu.be/RyeLupM53DM?si=bRqFZ2zwiX43xh-V